본문영역

본문영역

SPECIAL THEME
INTERVIEW
  • 파이어족 여신욱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으로
    일상을 디자인하다

    • 글. 강현숙
    • 사진. 이성근
  • 환상적인 그림에 매혹되기는 쉽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치열한 구상과 스케치까지 꿰뚫어 보기란 쉽지 않다. ‘파이어(FIRE)족’에 대한 환상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해서, 반복되는 직장생활에 싫증이 나서 파이어족을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서른여섯에 조기 은퇴하고 안정적으로 제주에 터를 잡은 여신욱 씨는 ‘뚜렷한 자기중심’을 대한민국 파이어족을 위한 핵심 키워드로 제시한다.

바다와 산이 보이는 제주 서귀포에 집을 얻은 지 3년째. 반려견 ‘만수르’와 하루 두 번 산책을 즐기고, 하고 싶은 운동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맘껏 즐기며, 잠깐 낮잠을 즐긴 후 책을 읽는다. 30대 중반에 은퇴를 결정하고 파이어족의 삶을 시작한 여신욱 씨의 보통의 나날이다.
한껏 여유로워 보이는 일상 뒤에는 사실 불안을 다스리는 법, 남과 비교하지 않는 법, 주체적인 자산관리 플랜을 세우는 일 등이 뒷받침된다. 파이어족은 ‘멈춤’이 아닌 새로운 방식의 또 다른 ‘시작’이다. 새로운 터에서 새로운 꿈을 꾸는 여신욱 씨가 말하는 파이어족은 어떤 모습일까.

서른여섯, 제법 안정적인 직장을 뒤로하고 조기 은퇴를 택했는데, 결정적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사실 회사 다닐 때 큰 불만은 없었어요.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었죠. 문제는 출근하고 나면 키우던 강아지가 하루 10시간 이상 혼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이 아이한테는 평생 나밖에 없는데 이렇게 방치하는 게 정당한가, 부채 의식이 있었죠. 한편 편도 1시간 반 이상이 걸리는 출퇴근길의 교통체증도 무척 고단했는데요. 그 시간을 때우기 위해 듣던 팟캐스트에서 ‘갭이어(Gap year)’를 다루는 데 귀가 뜨였습니다.
남은 인생의 방향성을 얻기 위해 1년쯤 멈추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80세쯤 되어 과거를 돌아봤을 때 시도해 본 것과 시도해 보지 않은 것 중 무엇을 후회할까? 답은 정해져 있었죠. 그렇게 제주 1년살이부터 시작했는데 완전히 빠져들어 퇴사를 결심하고 정착하게 됐습니다.

조기 은퇴를 실행에 옮기기까지 어떤 준비를 했나요? 시행착오는 없었나요?

제주에서 1년 동안 살면서 새로운 터전에 확신을 두게 됐어요. 자연환경이 멋지고 주거비가 서울에서 살 때보다 1/25로 줄어든다는 점도 매력적이었죠. 그다음 자산을 살펴야 했습니다. 전세보증금을 빼서 주식계좌로 합치고, 기대수익률에 따라 들어올 소득과 나갈 생활비를 계산했습니다. 수치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은퇴를 결심했죠. 처음 1년은 안정적이었어요. 그런데 2년 차에 코로나19가 닥쳤습니다. 전체 자산이 주식이었는데 반토막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궁즉통’이라고 했던가요. 위기가 닥치니 뭐든 하게 되더라고요. 디자이너 경력을 살려 부업 등을 하며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정말 아찔했지만 그동안 쌓은 경험치로 스스로 해결해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최근 자산시장이 급등해 본인이 준비한 것보다 이르게 퇴사하는 분이 많을 텐데요.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위기를 겪으리라 생각해요. 이때 한 조직에서 너무 오랜 시간 묶여 있던 분이라면 적응력이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50~60대의 경우 시행착오 기간이 길어지는 것이죠. 이에 대비해 조직 밖에서 생존하는 훈련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파이어족으로 산 지 3년, 삶을 대하는 태도도 많이 달라졌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삶이 극적으로 바뀌지는 않더라고요. 생활 패턴이 달라져도 금방 적응하게 되고요. 삶의 철학이 달라지기보다는 원래 존재하던 제 내면의 성향이 더 증폭되는 것 같아요. 온전히 자기만을 위한 시간이 많아지면서 나의 진정한 모습과 마주할 기회도 늘어난다고 할까요. ‘원래 나는 이런 사람이었구나’를 느끼면서 더 나다운 모습으로 살려고 합니다.

START YOUR WAY
파이어족에 막연한 환상을 가진 분들도 많습니다. 어떤 부분을 경계하며 준비해야 할까요?

내 삶에 대한 불만으로 파이어족을 꿈꾸는 이들이 많아요. 하지만 지금 상황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어떤 변화도 충족이 안 될 거라 생각합니다. 빠르게 경제적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자기 통제력을 발휘해 미래를 준비하고 노력하는 과정 자체도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지 출근이 싫고, 회식이 싫고, 상사가 싫은 사람은 은퇴 후에도 어떻게든 자기 인생을 싫어할 이유를 찾으려 할 테니까요.
조기 은퇴를 꿈꾼다면 내가 무엇을 내려놓고 포기해야 하는지를 먼저 깨닫는 게 중요해요. 시간을 포기하면 월급을 얻고, 월급을 포기하면 시간을 얻습니다. 절약을 포기하면 사치를 얻고, 플렉스를 포기하면 재테크를 얻죠. 모든 것은 자원의 등가교환이고, 총량이 정해진 에너지의 이동입니다. 내 주변에 주어진 자원을 어떻게 재배치할지,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으로 어떻게 디자인할지를 충분히 고민해야 합니다.

조기 은퇴를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유형도 눈에 보일 것 같습니다.

남과 나를 비교하는 사람, 사회와 나를 비교하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만족과 행복을 얻지 못합니다. 내가 그런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다면 하루에 소셜미디어에 쓰는 시간이 얼마인지 체크해 보면 될 것 같아요. 하루 한 시간 넘게 소셜미디어에 빠져 있다면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불안한 부분도 있을 텐데요.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100억 원씩 큰 자산을 조성해 조기 은퇴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당연히 월마다 꼬박꼬박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불안함이 생길 수밖에 없죠. 다만 이를 어떻게 컨트롤 하느냐에 따라 행복이 좌우되는 것 같아요. 불안함은 대부분 불확실성인데, 사람들은 고정 수입에 길들어져 불확실함과 실패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둘을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사업이든 인생이든 불안을 이기고 도전하여 성취하는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파이어족으로 행복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자세는 무엇일까요? 앞으로의 꿈도 궁금합니다.

파이어족에게는 다른 사람이나 외부의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독립적인 생각과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믿음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도 늘 그 훈련을 하고 있고요. 제주에 터를 잡고 살다 보니 여기에 맞는 꿈도 생겨났는데요. 인도네시아 발리의 경우 단순한 휴양지가 아니라 크리에이터와 창업자들의 메카로 통합니다. 자연환경과 멋진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라 전 세계에서 찾는 이가 많지요. 제주도 역시 아름다운 풍광과 이곳에 터를 잡은 다양한 분야의 크리에이터, 창업자분들이 계세요. 그분들과 네트워크를 만들어 발리 못지 않은 개성있는 명소로 발전시키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