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후반, 많은 사람이 스마트폰을 처음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다운로드받았던 애플리케이션이 있다면 바로 ‘국민 메신저’인 카카오톡일 것이다. 하지만 2020년대를 사는 우리는 카카오를 단순히 메신저 기능으로만 사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카카오는 이제 은행, 증권, 공유 경제 시장까지 진출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역 간 경계가 흐려지는 현상을 ‘빅블러(Big Blur)’라고 부르는데, 빅블러는 영어 ‘빅(Big)’과 ‘흐릿해진다’라는 의미의 ‘블러(Blur)’의 합성어이다. 이는 2013년, 책 <당신이 알던 모든 경계가 사라진다(조용호 저, 미래의창)>에서 경계 융화 현상을 일컫는 말로 본격적인 ‘빅블러’를 사용, 비즈니스 영역에서 주요 경계가 사라짐에 따라 나타날 변화를 역설했다.
무엇보다도 ICT의 발전은 ‘빅블러'를 더 가속화시켰다. 위에서 언급된 카카오처럼, ICT의 발전으로 인해 새로운 플랫폼 사업이 힘을 키우게 되고 에어비앤비, 우버 등 혁신 서비스가 속속 등장하면서 빅블러가 산업계의 대세이자 키워드가 된 것이다. 또한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경계가 사라지고 판매와 유통 등 다양한 산업의 영역 파괴가 가속화되면서 빅블러는 새로운 산업계의 패러다임을 만들고 있다. 즉 산업 고유의 진입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IT 기업이 은행업에 진출하게 되고 스마트폰 제조 회사가 완성차 시장에 뛰어드는 등 ‘빅블러’ 현상들이 계속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 산업계에는 어떠한 빅블러의 사례들이 있을까? 한 예로 네이버는 검색엔진 서비스로 시작해서 이후 온라인 쇼핑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이제는 네이버가 포털업체인지 온라인 쇼핑업체인지 헷갈릴 정도로 그 경계가 모호해졌다. 더불어 네이버는 금융, 자율주행차, 로봇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도 관심을 보이면서 비즈니스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온라인 쇼핑으로 빼놓을 수 없는 쿠팡 또한 최근에 신사업으로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를 새롭게 론칭한 것도 빅블러 현상 중 하나이다. 스타벅스도 커피업체가 아닌 핀테크 업체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세계 매장에서 사이렌 오더의 이용률이 높아지면서 스타벅스는 디지털 결제 시스템을 보유하며 금융업으로의 진출 가능성을 확인했다. 스타벅스의 공식적인 자료는 아니지만, 업계에서는 사이렌 오더의 이용률이 높아지면서 카드에 충전된 액수를 약 20억 달러(약 2조 4,000억 원) 규모로 추정하고 있다. 막대한 현금 보유액을 바탕으로 스타벅스는 2018년 아르헨티나 은행 방코 갈리시아(BancoGalicia)와 파트너십을 맺고 오프라인 은행 ‘커피 뱅크(Coffee Bank)’를 오픈하며 핀테크 시장에 문을 두드렸다. 스마트폰으로 우리 일상을 바꾼 애플 또한 대표적인 빅블러 기업이다. 스마트폰, PC, 노트북으로 유명한 애플이 최근에 전기차 사업에 뛰어든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데, ‘혁신의 대명사’인 애플이 선보일 전기차가 성공한다면 아마도 빅블러 현상은 산업계의 성공 공식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할 것으로 예상된다.
아울러 빅블러 현상이 산업계와 경영학 분야에서 잘 정착된다면 이젠 더 이상 ‘동종업계’라는 말이 무색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차나 토요타 등 자동차 업계에 애플이나 구글과 같은 혁신 기업들이 진출하게 된다면 더 이상 ‘자동차 업계’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빅블러 현상은 향후 10년의 산업 지형의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보이고 역동적으로 변화를 가속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빅블러 현상의 가속화로 산업 전반적으로 친환경화·지능화·서비스화 등으로 균형점이 빠르게 이동하게 될 것이며 이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디지털 전환’이라는 키워드가 자리 잡고 있다. 즉 인공지능(AI)·빅데이터 등 첨단 ICT를통해 기존 제품들의 디지털화 또는 이종 제품들의 네트워크화(디지털 컨버전스)가 진행되면서 다양한 분야의 산업이 융복합될 것으로 예측된다. 최근 한국은행의 보고서에서도 지난 100여 년 동안 안정적인 성장을 이어왔던 자동차 산업이 최근 전기차와 자율주행차, 공유차, 커넥티드카 등의 혁신으로 패러다임의 변화가 있음을 주목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 산업과 기업이 얼마나 이러한 빅블러 시대를 준비하거나 준비가 됐느냐는 것이다. 한 예로 우리나라의 전기차 산업 경쟁력은 중국·독일·미국·일본에 이어 5위 수준이며 자율주행차 및 인프라 도입 수준도 주요 30개국 중 한국이 7위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물론 여기에 만족한다는 의견도 있겠지만 ‘빅블러’라는 큰 파고와 변화에 맞서기 위해서는 우리 기업과 정책당국이 혼연일체가 되어서 빅블러 생태계에 대한 공감대와 인식을 조성하고 이와 관련한 제도 및 정책 마련에 적극 노력할 필요가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와 빅블러 시대, 우리 기업들의 어깨가 더욱더 무거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