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 여행

몽환의 순백에 빠지다

인제 원대리 속삭이는 자작나무숲

글 & 사진_ 여행작가 임운석

황량한 숲, 매몰찬 바람, 생선 등뼈처럼 앙상한 나무들, 주위를 돌아봐도 화려했던 시절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는 겨울 산의 풍경이다. 파란 하늘은 사무친 그리움에 파란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짙다. 옷깃으로 파고드는 서러운 바람 탓에 오래 머물 수는 없지만, 발길을 돌리는 순간 가슴을 짓누르던 상념들이 고드름처럼 툭툭 떨어진다. 그리움이 사무치는 겨울, 인제에서 자작나무의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 이국적인 정취에 빠져 있는 탐방객

  • 자작나무숲을 알리는 조각상

몽환의 세계를
향해

구불구불한 산길을 몇 고개나 넘었을까? 첩첩산중 산허리를 따라 굴곡진 길이 이어진다. 언제 내렸는지 알 수 없는 눈 때문에 차가 달팽이처럼 느리다. 이른 아침인 탓에 오가는 차가 별로 없다. 비탈진 길모퉁이를 돌아서자 드디어 목적지이다. 버스 전용 주차장까지 갖춘 넓은 주차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주차장 입구에는 농특산물 판매장도 있다. 잘 정돈된 모습이 깔끔하다. 아이젠과 스틱을 챙기고 옷매무새를 고친 뒤 서둘러 탐방로 입구로 향한다.
자작나무숲이 있는 원대리(院垈里)는 ‘집터’를 뜻한다. 그러니 자작나무의 집터라는 말이다. 북유럽이나 러시아 시베리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자작나무 숲이 인제에 조성된 이유가 있다. 원래 이곳에는 소나무가 무성했었다. 그런데 1980년대 솔잎혹파리가 이 일대에 창궐하면서 소나무가 말라 죽어 황폐해졌다. 이에 산림청이 죽은 소나무를 베어내고 1989년부터 1996년까지 국유림 138ha에 자작나무 70만 그루를 심기 시작했다. 눈앞에 펼쳐진 이국적인 풍경은 그렇게 조성되었다. 누가 이름을 지었는지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다.
자작나무숲에 닿으려면 임도 3㎞가량을 걸어가야 한다. 입구 안내원의 말에 따르면 천천히 걸어도 1시간 30분이면 도착한다고 한다. 길이 급한 경사면은 아니지만, 눈이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면서 일부 구간은 빙판길처럼 미끄럽다. 따라서 반드시 아이젠을 챙겨야 한다.
한참을 걷다 시야가 탁 트인 곳에 서서 수묵화처럼 농담이 서로 다른 산세를 바라본다. 깡마른 나뭇가지들이 처연하게 서 있다. 그 모습이 하늘에 풍요를 기원하는 솟대 같기도 하고, 구약 성경에 나오는 야곱이 본 천국으로 향하는 사다리 같기도 하다. 이런 상상은 오로지 자작나무의 모습에서 기인한다. 자작나무 특유의 색감과 올곧게 하늘로 뻗은 자태 때문이다.
이따금 숨을 돌려가며 1시간 남짓 걸었다. 이전과 다른 평평한 길에 이르자, 주변에 벤치도 있고 화장실도 있다. 먼 곳에는 겹겹이 층을 이룬 산들이 혹독한 겨울에 맞선 채 절대 물러서지 않을 듯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반대편에는 몽환의 신세계가 펼쳐진다. 거인이 큰 삽으로 흙을 파낸 것처럼 움푹한 넓은 분지에 자작나무가 빼곡하다. 사방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덫에 걸린 듯 쉽게 빠져나가지 못한 채 ‘윙윙’ 거리는 이곳은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이다. 능선은 물론, 가지마다 하얀 눈이 내려앉아 천지가 눈부신 ‘겨울왕국’ 이다. 감탄에 감탄을 이어가며 쌓인 눈을 밟는다. 뽀드득 소리에 귀가 즐겁다. 두 사람이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 오솔길은 안쪽 깊숙이 들어갈수록 운치를 더한다. 숲 한가운데 서서 주변을 돌아본다. 온통 새하얀 나무뿐. 다른 색이 한 점도 없는, 순백이다.

  • 이국적인 풍경의 속삭이는 자작나무숲

  • 독특한 색감을 뽐내는 자작나무

순백의 절경,
나를 향한 속삭임을 듣다

자작나무는 사계절 특별한 매력을 발산한다. 그중에서 겨울 자작나무는 백미에 꼽힌다.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북유럽의 깊은 숲속이나 광활한 시베리아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래서 더욱더 이국적이다. 백야의 숭고한 아름다움을 닮았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뽀얀 속살을 드러낸 순결한 미녀가 한둘이 아니다. 미끈한 몸매 또한 여느 나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다. 탁했던 영혼마저 표백해 줄 것처럼 순백이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한 폭의 수채화’라는 흔한 표현을 쓰고 싶지 않지만, 도리 없다. 정말 한 폭의 수채화다.
자작나무는 목질이 단단하고 뒤틀리지 않아 목각 작업용으로 즐겨 이용한다. 또 껍질이 기름지고 잘 썩지 않는다고 알려져 팔만대장경을 제작할 때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나무 이름은 나무가 불에 탈 때 ‘자작자작’ 소리를 낸다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키는 20~30m 정도 자란다. 그러니 하늘 사다리라 불러도 괜찮지 않은가.
숲에는 모두 세 개의 탐방로가 있다. 1코스 자작나무 코스(0.9㎞)는 자작나무 숲을 탐방하고, 2코스 치유 코스(1.5㎞)는 자작나무 숲을 지나 천연림을 만난다. 3코스 탐험 코스(1.1㎞)는 숲속 계곡과 임도를 함께 탐방하는 코스이다.
숲에 있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들이 밀려왔다가 밀려간다. 답답했던 생각들이 정리되는 과정이다. 자작나무는 경제적 가치보다 정서적 가치가 더 크다. 삭막한 도시인들에게 숲의 가치는 계량화할 수 없는 감성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자작나무의 순결함은 파란 하늘을 향한다. 나무의 근원은 비록 흙에서 나왔으나 나무가 향한 곳은 언제나 밝게 빛나는 높은 하늘이다. 하늘이 파랗지 않다면 모든 풍광이 흑백으로 처리될 것 같다. 나무와 숲과 땅이 그렇다. 겨울 한가운데 서서 병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하늘의 빛을 전하는 자작나무가 고맙다. 그 모습이 광야를 걸어가는 순례자처럼 의연하다.
자작나무가 귓전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 같다. 그것은 세미한 울림이다. 하늘을 향한 자작나무의 몸짓은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라 말한다. 흙탕물 같은 세상에서 찌들 대로 찌든 슬픈 과거를 숲에 던지라 한다. 네가 떠난 뒤 순백의 눈으로 덮어주겠다고. 어깨에 짊어진 무거운 짐도 내려놓고 가란다. 삭풍이 불어와서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날려 버릴 거라고. 발목을 붙잡은 과거의 상처도 묻고 가라 한다. 발목보다 깊이 쌓인 눈이 상처를 덮어줄 테니. 사람들이 숲을 찾는 이유는 이 같은 자작나무의 속삭임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소리에 집중해 보자. 나를 향한 속삭임을 듣기 위해서.

임도 주변에도 자작나무가 가득하다.

  • 인제 겨울 여행 팁

    반드시 아이젠과 등산용 스틱 등 겨울 등산 장비를 챙겨야 한다. 정상부는 체감온도가 급감한다. 방한복과 털 모자, 귀마개, 장갑 등을 준비해야 자작나무 숲에 오랫동안 머물 수 있다. 동절기 운영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입산 마감은 오후 2시까지이다.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자작나무숲길 760
    자작나무숲 안내소(속삭이는 자작나무숲)

    인제국유림관리소 033-460-8014

  • 인제 맛있는 여행

    인제는 우리나라 황태 생산의 80%가량을 차지할 만큼 황태가 유명하다. 용대리 황태덕장에 황태 맛집이 많이 모여 있다. 추위에 언 몸을 따뜻한 황탯국으로 녹여보자. 뽀얀 국물이 우러난 황태해장국은 무와 황태, 콩나물을 넣어 맛있다. 황태구이는 포슬포슬한 속살과 구수한 황태의 식감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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