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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을 매료한

K-라면의 역사

글_ 허승희

뉴욕 타임즈에 실린 한국 라면 품귀 현상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듯 K-라면의 인기는 날로 높아지는 추세다.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한국 라면의 역사를 알아보자.

바다를 건너온 꼬부랑 국수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은 일본에서 발명됐다.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 거리에는 식량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즐비했다. 일본 최대의 라면 기업 ‘닛신’의 창업자인 안도 모모후쿠는 오사카역의 라면집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보고 구호물자로 보급된 밀가루를 이용해 인스턴트 라면을 개발을 결심했다. 그 후 1958년 8월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인 ‘치킨 라멘’이 출시됐다.
일본의 안도 모모후쿠처럼 우리나라에는 전중윤 씨가 있다. 그는 남대문 시장에서 꿀꿀이죽을 먹기 위해 모인 인파를 보고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다졌다. 정부 당국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정부에서 지원금을 배당받았고 일본의 묘조식품으로부터 기계와 기술을 도입해 1963년 9월 15일 한국 최초의 라면을 출시했다. 이게 바로 한국 라면의 시초 ‘삼양라면’이다.

백조가 된 미운 오리 새끼

식량난을 해소하고자 만들어진 라면이었지만 쌀을 주식으로 삼던 한국인들에게 라면은 낯설기만 할 뿐이었다. ‘밀가루가 밥이 되냐?’라고 묻는 사람들의 냉담한 반응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삼양식품이 발로 뛰는 홍보에 나선 것이다. 극장이나 공원을 다니며 무료 시식회로 라면을 알렸고 이러한 기업의 적극적인 홍보 전략과 1965년에 실시한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이 맞물리면서 라면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1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으며 영양이나 맛도 뒤떨어지지 않으니 라면을 먹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삼양라면이 반응을 이끌자 1965년에는 농심의 전신회사인 주식회사 롯데공업도 라면 사업에 뛰어들었다. 국민에게 외면받던 라면이 빠르게 인기를 얻자 풍년식품, 신한제분 등 여러 식품 회사의 도전이 이어졌으나 최초의 라면인 삼양라면의 점유율을 이기지 못하고 1969년에는 삼양식품과 농심만이 남게 됐다.

K-라면, 어디까지 성장할까?

1969년 삼양식품이 대한민국 최초로 해외에 라면을 수출한 이후 K-라면은 활동 영역을 조금씩 넓히고 있었다. 한국 라면의 수출액은 2015년부터 9년간 꾸준히 증가해왔는데 전 세계를 마비시킨 코로나19는 한국 라면 수출액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코로나19의 무서운 확산세에 세계적으로 생활 반경을 제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는데, 집에 쟁여 놓을 수 있을 만큼 소비 기한이 길고 간편하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라면이었기 때문이다. 통계 자료를 보면 코로나19 확산 첫해인 2020년의 라면 수출액은 2019년 라면 수출액인 4억 6,700만 달러에서 29.2% 증가했다. 오스카 4관왕을 차지하며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 등장한 짜파구리(짜파게티+너구리)와 유튜브, 틱톡에서 유행처럼 번진 외국인들의 불닭볶음면 챌린지의 영향도 더해졌다.
5월 19일 관세청에서 조사한 수출입 무역통계에 따르면 4월 라면 수출액은 1억 859만 달러로 전년 같은 달 대비 무려 46.8% 증가하며 최초로 월 1억 달러를 돌파했다. 1월부터 4월까지의 라면 수출액은 3억 7,886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달과 비교하면 34.4% 상승했다. 이러한 추세를 보면 올해의 라면 수출액은 10년 연속으로 역대 최대 실적을 능가할 것이 예상된다.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며 증가하는 한국의 라면 수출액은 K-라면의 인기를 증명하고 있다. 한국만의 개성으로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선 K-라면, 아직도 무수한 발전 가능성이 있기에 그 미래가 더욱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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